K-1도 어느덧 10년 세월을 훌쩍넘어 수많은 명승부와 전설을 이어왔다. 지난 3일 2006년 월드 그랑프리 까지 무려 14번의 월드 그랑프리 챔피언을 배출하며 명실상부한 온글러브 입식타격의 최고봉의 자리를 굳건히 해온 것을 넘어서, 세계 최대의 격투 스포트 이벤트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올해 월드그랑프리 파이널은 그 어때보다 상징적인 사건이 많았던 대회로 평가된다. 지난 몇년간 차근차근 준비되어 온 세대교체가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것이 나름대로 가장 큰 성과로 풀이된다. 루슬란 카라예프를 필두로 할리드 '디 파우스트', 폴 슬로윈스키와 바다 하리 까지 '영건(Young gun) 체재'는 이제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번 그랑프리에서 비약적인 성과를 거둔 영건은 없었지만, 향후 K-1 10년을 이끌 재목은 이 중에서 나올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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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건 체재가 점점 공고해져 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의미고, 그 원래 자리의 주인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번 월드 그랑프리 2006 도쿄 결승전에서도 역시 또 하나의 전설이 링에서 작별을 고했다.

97년, 99년, 00년, 02년  챔프였던 무결점 파이터 '미스터 퍼펙트' 어네스트 호스트가 그 주인공. 은퇴번복 후 복귀라는 초강수를 두며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지만, '극강챔피언' 세미 쉴트에게 전설을 이어주며 링 위를 떠났다. 세미 쉴트가 2년 연속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며 우승이 확정된 후 링위에서 호스트의 두번째 은퇴식이 치뤄졌다.(첫번째 은퇴식은 잘 알다시피 '도망자' 밥 샙이 망쳐버렸다.)

호스트의 단란한 가족이 총출동한 은퇴식도 감동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먼저 은퇴한 마이크 베르나르도의 은퇴식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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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앤디 훅, 피터 아츠와 함게 사대천왕으로 90년대 후반 K-1 황금시대(Golden Times)를 이끌었던 '호완' 베르나르도는 지난 WGP 2006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가졌었다. 한마디 한마지 진심이 그대로 전해지는 진솔한 은퇴사와 함께 성원을 보내오는 팬들의 모습을 한사람 한사람 가슴으로 담고자하는 듯 그윽한 눈길로 관중석을 바라보던 파이터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다시한번 격투에는 로망이 있다는 신념을 되새기게 해주었다.

베르나르도는 빼어난 복싱 테크닉을 바탕으로 입식 타격의 기반은 역시 펀치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소 증명해 보인 파이터였다. 그 자신 스스로 빼어난 복서이며 강펀치의 소유자였지만 그가 K-1에 몰고 온 '베이직 복싱'의 정신이야말고 챔피언 벨트 보다도 더 값진 성과였을 것이다.

호스트의 은퇴식 자체는 감동이 덜 했지만, 그의 은퇴 사실 자체는 울림이 매우컸던 것도 사실이다. K-1에 기술 중심의 격투 스타일을 자리잡게 한 업적은 그 어떤 파이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위대한 것이었다. 먼저 타계한 앤디 훅이 K-1에 '무혼'을 불어넣었다면, 호스트는 그 혼에 기술이라는 실체를 입혀내 오늘의 K-1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단한 가드와 영민한 풋 워크를 바탕으로 펀치와 킥을 절묘하게 섞어내는 컴비네이션은 호스트 이후에서야 기본기로 자리잡았다. 호스트의 하드웨어를 뛰어넘는 재원은 현재도 많이 있지만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거리를 조절하며 다양한 컴비네이션을 조합해 내며 대응 전략을 구사하는 소프트웨어는 결코 복제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미르코 '크로캅' 필로포비치와 제롬 르 밴너를 끝내 '무관의 제왕'으로 눌러앉혔던 호스트의 그 소프트웨어는 다시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뛰어난 경기운영 능력으로 토너먼트를 어떻게 지배하는 지에 대한 표준 모델을 제시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 중에 하나이다. 지면을 스치며 멋진 궤도를 그리며 날아가서는 상대의 다리를 채찍처럼 휘감는 '명품' 로우킥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말년에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렸던 슬립 다운 마저도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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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와 베르나르도가 K-1 링위에 전설을 남긴채 그 링을 내려오자 자연스럽게 피터 아츠에게 그 시선이 쏠렸다. 은퇴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던 것도 사실이지만, 피터 아츠는 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번 결승전에서도 리저브 매치에서 무사시를 철저하게 격파한데 이어, 레미 본야스키의 부상으로 대신 4강에 진출. 우승후보 글라우베 페이토자의 '브라질리언 킥'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최근 피터 아츠의 신무기로 완전히 자리잡은 노련미로 결승 진출이라는 믿지 못할 장면을 연출하며 K-1 WGP 결승전 전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이어갔다.

피터 아츠에게 시선이 쏠리는 또하나의 이유는 호스트가 꾸준히 쇠퇴해 온 끝에 은퇴로 마무리한데 반해 피터 아츠는 여전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K-1 초창기부터 매년 WGP에 출전해 온 피터 아츠였지만 그동안 크고 작은 부상으로 하락세를 보여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 WGP 결승전을 앞두고 메지로 짐 설립자인 얀 플러스를 영입하며 변화를 예고했는데, 일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무사시 전에서 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피터 아츠는 꽤 오랜기간 '하이킥'의 대명사였다. 크로캅의 '궁극의 왼발 하이킥'에 그 명성이 다소 퇴색되기는 했지만, 피터 아츠의 큰 궤도를 그리며 치솟아 상대의 머리를 휘감는 하이킥이야 말로 정통 하이킥이라고 극찬하는 팬들이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피터 아츠는 하이킥으로 경기를 끝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실로 오래된 이야기지만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는 피터 아츠의 경기 때마다 그의 하이킥을 기대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의 피터 아츠는 호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연륜에서 나오는 '노련미'를 보여줬었다. 날렵한 몸매에 군살이 붙어 스피드는 떨어졌지만, 100전을 넘어선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노련한 경기운영 능력으로 부족함을 채워 나갔다. 이번 무사시 전에서는 경기운영 능력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인 무사시를 철저하게 압도했다. 불어난 체중을 그대로 펀치의 파괴력으로 담아내며, 무시무시한 화력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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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는 다소 떨어지지만 워낙 좋은 타이밍에 펀치를 다양하게 구사하다보니 느린 것은 문제로 지적하기도 여려워 보였다. 최근 폭락 수준인 무사시는 그렇다 하더라도 강력한 우승후부 페이토자까지 부지불식간에 양 훅으로 무너트린 것은 피터 아츠의 저력을 그대로 증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최소한 무사시 보다는 피터 아츠 쪽이 선수 생활을 오래 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내년시즌 은퇴를 앞둔 노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생애 몇 남지 않은 리벤지의 기회를 줄 가능성이 큰데 가장  기대가 되는 상대는 최근 급성장한 스테판 '블리츠' 레코이다. 올드팬들이라면 기억하겠지만 레코는 두 차례나 피터 아츠를 잡아낸 적이 있다. 레이 세포에게도 리벤지가 남아있고 밴너와 워낙 명승부를 연출해낸 적이 있기 때문에 K-1 측에서도 피터 아츠를 활용할 카드는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르나르도와 호스트가 은퇴한 가운데 건재를 위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피터 아츠... K-1 14년 역사를 함께한 이들 '올드 보이(Old boy)'들의 움직임이 그 어느때보다 눈길을 끄는 이유는 최근의 K-1의 분위기와 큰 관련이 있다. 비욘 브레기와 최홍만 그리고 세미 쉴츠까지 이어지는 '빅 맨(Big man)'들이 가공할만한 사이즈를 바탕으로 K-1 링을 점령해가고 있는 가운데, 기술와 투혼이 살아있었던 예전 올드 보이들의 시대에 '향수'가  되살아 나고 있는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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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회도 우승은 세미 쉴츠에게 돌아갔지만, 온통 팬들의 성원은 호스트에게 쏟아졌고 피터 아츠의 승리를 바라는 팬들이 훨씬 더 많은 박수를 보내왔다. 세미 쉴츠가 그런 사이즈에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의 움직임과 원거리 공격을 바탕으로한 가공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주지는 못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진정한 챔피언으로 추앙 받기 위해서는 사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일종의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쉴츠에게는 이 부분을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호스트와 베르나르도의 은퇴와 피터 아츠의 노장투혼에 훨씬 더 눈에 밟히는 것 일까?  WGP 2연패를 달성한 세미 쉴츠가 비록 챔피언 벨트를 가졌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영원한 챔프는 바로 호스트와 피터 아츠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하루빨리 세미 쉴츠와 최홍만도 '빅 맨'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팬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챔피언의 반열에 오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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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격투칼럼니스트 이정민/ 격투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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